존 다나허 8부작 인터뷰 1편 : 철학도에서 주짓수 마스터로, 존 다나허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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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짓수의 아이콘, 존 다나허

주짓수계에서 존 다나허라는 이름은 하나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주짓수에 입문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번 인터뷰에서 다나허는 그의 독특한 배경과 주짓수와의 만남을 회상했다.

철학에서 파워리프팅까지, 다양한 이력

다나허는 처음에는 철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바운서로 소개하며 그라운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자라면서 ‘격투’는 주로 타격을 의미했어요. 킥복싱을 하면서 저는 항상 타격이 강한 사람이 가장 강하다고 믿었습니다,” 라고 다나허는 회상했다. 당시 뉴질랜드에서는 레슬링 문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다나허에게 레슬링은 올림픽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한 스포츠’로 여겨졌다고 한다.

뉴욕에서의 문화 충격과 UFC의 등장

1991년, 다나허는 뉴욕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그는 유도나 레슬링 기술을 사용하는 바운서 동료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뉴욕은 당시 폭력적이었고, 그래플링 기술은 그가 알던 싸움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던 중 친구가 다나허에게 ‘브라질리안 주짓수’라는 무술을 소개하며, 이는 대부분 그라운드에서 이루어진다는 설명을 들었다. “브라질? 주짓수? 그건 일본의 유술이 아니었나요?” 라며 그는 의문을 가졌다.

주짓수와의 첫 만남

다나허는 당시 무게가 104kg 정도였고, 친구는 63kg 정도였다. 하지만 그 친구가 주짓수를 수련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다나허의 헤드락을 풀고 그의 뒤로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난 너보다 두 배는 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넌 고작 2주밖에 안 배웠는데?” 그 경험은 다나허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는 주짓수 도장을 찾아가게 됐다.

주짓수가 인생을 바꾸다

다나허는 주짓수를 배우면서, 싸움의 기본기를 능숙히 익히고자 했다. 그는 월드 챔피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지만, 주짓수 기술을 통해 바운서로서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주짓수는 제 삶을 구했습니다,” 라는 다나허의 말은 그가 주짓수를 통해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존 다나허의 이야기는 주짓수가 단순한 무술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경험은 주짓수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의 여정은 주짓수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영감을 줄 것이다.

– 인터뷰 원문 –

조 로건 : 당신의 백그라운드부터 시작하죠.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당신은 철학과 학생이었고, 술집에서 바운서(술집, 클럽 등에서 취객을 정리하는 직업)로 일했고, 몸이 우락부락한 파워리트터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방어에 관심을 갖게 돼서 주짓수를 시작한 것이죠.

존 다나허 : 맞습니다. 하지만 제 원초적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자랐던 뉴질랜드에서 ‘격투’란 ‘타격을 뜻했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연령이니 당신도 내게 공감할 겁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무술’은 거의 대부분 타격을 뜻했죠. 1980년대에 마이크 타이슨은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복서’가 아녔습니다. 사람들은 타이슨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파이터’로 여겼죠. 저도 뉴질랜드에서 자란 십 대 때 킥복싱을 했죠. 뉴질랜드는 레슬링 문화가 없는 극소수의 나라입니다. 아마 한때 그런 게 있었다고 맥이 끊긴 거 같습니다. 저한테 레슬링이란 사 년에 한 번씩 올림픽에서 보는 스포츠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걸 격투라기 보다는 걍 서로 다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괴상한 스포츠로만 여겼죠. 뉴질랜드에서는 실제로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서로 뒤엉켜서 싸우면 주변에서 ‘일어나서 남자답게 싸워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선 동료 바운서들이 유도나 레슬링 기술을 이용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을 보고 문화 충격을 받게 됐죠.

조 로건 : 그게 언제쯤이죠?

존 다나허 : 90년대 초반입니다. 91년일 겁니다. 91년도 말에 전 뉴욕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뉴욕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91년도에 뉴욕에서 일어난 살인 범죄 발생률은 역사상 최고였습니다. 뉴욕은 폭력적인 도시였고, 그런 환경에서 그래플링 기술을 싸움에 활용하는 동료 바운서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뉴욕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었는데, UFC라는 쇼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 브라질 사내 하나가 나타나서 레슬링으로 상대를 넘어뜨리고 목을 조르고 팔을 꺾으면서 상대방을 모두 이겼다는 얘기였죠. 그리고 대학에서 같이 PHD 과정을 받고 있던 친구 하나가 와서 말해준 겁니다.

‘존, 넌 바운서로 일하고 있잖아. 그리고 싸움이 일어나면 거의 다 그라운드로 가게 돼 있다고 얘기했고. 근데 내가 이 브라질리안 주짓수라는 무술을 들었는데, 이건 대부분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싸움이래. 혹시 관심 갖고 있어?’

전 브라질이라는 나라에 그런 무술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무술이라고 하면 다 일본이나 한국 같은 데서 온 줄 알았죠. 브라질? 카포에라? 이건 누구래? 주짓수(유술)면 일본이어야 하는 거 아냐? 전 그런 반응이었죠. 그때 전 몸무게가 104kg 정도 나갔습니다. 그 친구는 무거워봤자 63kg 정도 나갔죠. 수련한지 2주 정도 됐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말했죠.

‘주짓수는 그라운드로 가서 계속 레슬링을 하는 거야.’

‘그래? 그럼 내가 헤드락을 한 번 걸어볼 테니까 네가 뭘할 수 있는지 보여줘 봐.’

전 사무실 문을 닫고 가구를 한쪽으로 치운 다음에 헤드락을 걸었습니다. 그때 제가 할 줄 아는 건 헤드락밖에 없었으니까요. 전 힘이 제법 강했고 모진 헤드락을 걸 수 있었습니다. 전 그때 대충 곁누르기 형식의 헤드락을 걸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친구는 제 뒤로 슬금슬금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분 정도 지났을 때 전 상대방에 대한 컨트롤을 모두 잃었고 상대방은 제 등에 있었죠. 그때 전 백 어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지만 상대방이 뒤에 있다는 건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습니다. 전 팔에 힘이 슬글슬금 빠져가고 있었고 상대방에 대한 컨트롤을 다 잃었고 결국에 일어나서 도망가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전 충격 받았었습니다. 난 너보다 체격이 두 배는 큰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넌 고작 2주밖에 안 배웠는데? 이게 만약에 실제 싸움이었다면?

그렇게 전 주짓수 도장에 찾아가게 됐고 첫 날에 완전히 박살났습니다. 그때 가장 벨트가 높은 사람이야 블루 벨트인 멧 세라 정도였죠.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을 그렇게 만나게 됐다는 것도 참 재밌습니다. 전 주짓수를 능숙하게 될 때까지 배우고 싶었습니다. 전 월드 챔피언이 되는 것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싸움의 필수적인 소양을 능숙히 익히고 싶었죠. 그러면 바운서 역할을 더 쉽게 할 테니까요. 제 생각은 맞았습니다. 굉장히 짧은 기간 하에 전 더 쉽게 상대방을 제압하게 됐습니다. ‘주짓수는 제 삶을 구했습니다.’ 너무나 많이 쓰이는 표현이죠? 하지만 전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운서 역할을 하면서 적어도 네 번은 주짓수가 내 생명을 구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