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미츠요(前田 光世). 별칭 콘데 코마(Conde Koma). 일본의 유도가. 유도 7단. 2000번 싸워서 모두 이긴 스트리트 파이터의 전설(사실 이것도 최배달이나 모이헤리 지고로 같은 다른 일본무도가들처럼 이름 없는 선수들과 쌓아올리면서 만든 커리어다. 실제로 유럽에선 레슬링룰로 싸워 진적이 몇번 있기는 하다. 그래도 그의 전적을보면 역대 일본무도가들 중에서는 최고에 속한다.). 본명은 마에다 히데요(강도관에 입문한 후 이름을 마에다 미츠요로 개명하게 된다.). 브라질리안 주짓수의 창시자인 카를로스 그레이시와 그레이시 가문의 스승. 사실상 수두루빽빽한 일본출신의 신격화된 무도가중에서 가장 강한 인물 중 하나. 일본 무술가중에서 이렇게 싸우고 돌아다닌건 마에다 미츠요와 최영의 정도뿐이고 세계적으로 봐도 그다지 없다(그레이시 애들이 맨날 싸우고 다니는게 다 이유가 있다.). 최강을 추구하고 그걸 몸소 실행한 무술가이자 현대 MMA 의 아버지로 볼 수 있다.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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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출생일 | 1878년 11월 18일 |
출생지 | 일본 아오모리현 |
사망일 | 1941년 11월 28일 |
사망지 | 브라질 |
신장 | 150cm 후반정도로 추정 |
체중 | – |
격투 기반 | 유도(고류유도) |
스승 | 토미타 츠네지로 |
유파 | 강도관(講道館) |
생애
아오모리 현에서 태어나 1895년에 아오모리현 제일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와세다 중학교(현재는 와세다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아버지는 스모 선수였고 그도 10대 시절 스모를 수련했지만, 체격을 이유로 그만두었다. 야구 선수 생활도 했었다고.
스모 선수를 관뒀을 때 즈음, 그 당시 유도가 어전 유술 대회에서 고류 유술을 그야말로 개발살내는 것에 감동하여 유도에 흥미를 느꼈는데, 때마침 도쿄 전문 학교(현재는 와세다대학)에 유도장이 생겼고 곧장 유도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다 1897년 6월에 강도관에 입관하게 된다.
그는 입단할 때 관장인 가노 지고로에 의해 특별히 지명되어, 강도관의 4천왕 중에서 최단신이었던 토미타 츠네지로를 스승으로 삼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작은 키 때문이었다(향간에는 그의 키가 164cm로 표현되는데, 아마도 이는 단위에 의한 착오로 보인다. 그 당시 164cm면 일본 평균 신장을 웃도는 키였다. 그렇다면 그가 키가 작은 걸로 유명할 리도 없다. 아마도 150대 중후반인 것으로 보인다.). 가노 지고로는 유도에서 중요한 건 신장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토미타 츠네지로는 가노 지고로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받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아무래도 마에다 미츠요의 재능이 심상치 않았던 보양이다. 초단 심사를 받을 때는 가노 지고로에 의해 그만 특별히 15인 연속 대련을 명받고 훌륭히 달성한다. 게다가 현재의 브라질리안 주짓수 정도로 승급이 힘들었던 당시의 유도 승급 체계에서 7년도 안돼 4단을 땄다는 건 그가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04년, 유도 4단이던 시절 멀쩡히 잘 다니던 도쿄 전문 학교(현재의 와세다대학)을 관두고 그의 스승 토미타 츠네지로와 함께 유도 전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웨스트 포인트에서 유도 시범을 보이게 되는데, 토미타 츠네지로가 그만 레슬링 베이스의 선수에게 지게 된다. 하지만 마에다 미츠요가 그 레슬러를 포함한 모든 도전자를 제압했다. 또 친일파였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에서 초청시합을 갖는데 그의 스승이 또 패배. 이에 미츠요는 유도의 강함을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스트리트 파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그 당시의 미국의 치안상황은 19세기 중반과는 비교할 수없지만 그야말로 고담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는 그런 고담수준의 동네는 피해다녔다. 그는 그 틈바구니에서 ””나를 이기면 1000달러””라는 간판을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하니 160cm 도 안되는 남자가 그런 간판을 걸고 다녔으니 그 반응은 어땠을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그의 배짱도 보통을 넘어서 칼날과 총알이 날라다니는데도 쫄지 않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그를 슬금슬금 피하게 되었다. 또 그는 실전 중심의 파이터여서 일정을 잡고 대련을 하는 것도 무척 싫어했다고. 말그대로 밥먹듯이 싸우러 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명성을 쌓아간 그는 미국의 스트리트 파이터계의 최강자 부처보이와의 일전을 갖게 된다. 부처보이는 당시 190cm의 괴력의 소유자였고, 시합이 정해지자 마에다 미츠요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당연한 예상인 게 아무리 유도의 강자라고 하더라도 30cm가 넘는 키와 체급의 차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경기는 마에다 미츠요쪽으로 기울고… 링위에서 레슬링룰로 진행된 시합에서 애초에 천부적 그래플러인 마에다 미츠요에게 부처보이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번이나 메쳐져서 개발살난 부처보이는 결국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데 내심 스트리트 파이트를 기대하고 있던 마에다 미츠요는 그를 플라잉 암바로 제압해 게임을 끝내게 된다. 이 승리로 인해 미국에 유도의 강함이 널리 전파되게 된다.
그는 전세계에 유도의 강함을 알리기 위해 1908년에 스페인으로 건너가게 된다. 다만 여기서 레슬링 룰 때문에 패배한 전적이 있어지만 곧바로 훌훌털고 그 이후 연전연승은 계속됐고, 스페인에서도 그의 명성은 계속되게 된다. 처음에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코마루라는 별명을 붙여졌는데, 코마루는 일본어로 ’곤란해’ 혹은 ’곤궁해’라는 뜻. 돈이 생기면 규모없이 막 써버리는 그의 경제관념 때문에 그는 돈이 떨어지면 말버릇처럼 ’코마루.. 코마루..’하였고 주위 스페인 사람들이 그에게 코마루라고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그가 ’곤란해’라는 별명을 좋아할 리 없었고 그래서 별명을 ’코마’로 바꾼다. 이후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그의 모습에 감명받은 스페인들은 그에게 ’백작’이라는 작위를 붙여 그를 ’콘데 코마’라고 부르게 된다.
세계를 유랑하던 그는 1915년에 브라질에 유도장을 차리고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마도 브라질에서는 유도라는 이름 대신 유술이라는 이름으로 유도를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가 타류 유파와의 프로 시합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고 이를 어긴 마에다 미츠요가 스스로 강도관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유도라는 이름 대신 유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에다 미츠요는 고류 유술을 가르쳤다고 오해하는데 그는 뼛속까지 유도 기반의 파이터였다. 대신 지금의 유도를 토대로 상상하면 안된다. 당시의 유도는 펀치, 킥이 허용되는 무술이었고, 마에다 미츠요는 한발 더나가 실전 싸움을 통한 자기만의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에(예를 들자면 하단 태클) 그가 구사했던 유도는 지금의 유도보다는 오히려 MMA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그 당시 브라질은 미국과는 달리 적극적인 이주 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1927년 일본기업들은 토마사수라는 아마존 유역에 대규모 일본인 이민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이에 마에다도 중요 인물로 참여하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지 계획은 좌절되고 마에다는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만을 하게 된다.
그가 브라질에서 정착하면서 브라질의 유지들과 교분을 갖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가스타우 그레이시였다. 가스타우 그레이시는 일본인 이주에 많은 도움을 줬고, 마에다 미츠요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싸움을 일삼던 카를로스 그레이시를 가르치게 된다.이렇게 또 하나의 전설이 시작된다.
그는 그 이후에도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말년을 브라질에서 보낸다. 카더라 통신에는 그가 일본에 돌아가지 못한 것은 강도관에서 파문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1940년에 일본정부에 의해 초청을 받은 적도 있다. 그가 일본행을 택하지 않은 것은 아내와의 의리 때문이었다. 그는 44세에 두번째 아내를 얻게 되는데 (첫번째 아내는 사별했다) 그 당시엔 브라질 사람과 결혼한 일본인이 일본으로 귀환했다가 영 종적을 감춰버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브라질이 아무래도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약한 아내를 사랑했고,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일본행은 일생동안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브라질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사인은 신장질환. 신장병이 생기게 된 건 열악한 브라질의 수질탓이었다고 한다. 그는 임종시에 유도복을 가져오라고 한 뒤 ”아오모리의 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고 영면한다.
기타
그가 브라질에 뿌린 유도의 씨앗은 50년 후 브라질리안 주짓수라는 화려한 꽃이 된다. 브라질에서 숨을 거뒀지만 그의 명성은 일본에도 자자했던 것 같다. 브라질에서 엘리오 그레이시와의 대전을 치룬 유도천재 기무라 마사히코는 두 팔이 모두 부러질 때까지 끝까지 싸운 엘리오 그레이시에게 이 한마디를 남긴다.
”과연 마에다 미츠요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엘리오의 투지야말로 일본 무사의 거울이다. 경기는 내가 이겼으나 승부에 대한 집념에서는 패배했다.”
권아의 그림 작가 후지와라 요시히데가 ’콘데 코마’라는 제목으로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