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오 그레이시(포르투갈어: Hélio Gracie, IPA: [ˈɛliu ˈɡɾejsi], 1913년 10월 1일 – 2009년1월 29일)는 브라질의 브라질 유술가로, 그레이시 유술의 창시자다. 그는 주짓수 레드벨트 9단이자 주장컨데 브라질리언 주짓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0~1940년대에 가장 처음으로 그레이시 주짓수를 대표한 그는 또한 1990년대 초 시합(경쟁)에서 이름을 날린 그레이시 가문을 대표하는 많은 선수들(호일러, 힉슨, 호이스 그레이시)의 아버지이자 마스터였다. 그의 혈통과 유산은 주짓수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엘리오 그레이시는 브라질리언 그래플링의 아버지로써 존경받는 인물이다.
기본 정보 | |
---|---|
국적 | 브라질 |
출생일 | 1913년 10월 1일 |
출생지 | 브라질 벨렝 |
사망일 | 2009년 1월 29일 (95세) |
사망지 | 브라질 페트로폴리스 |
신장 | 170cm |
체중 | 65kg |
격투 기반 | 브라질 유술, 유도 |
트레이너 | 카를로스 그레이시 |
선호하는 기술 | 크로스초크(Cross Choke) |
랭크 | 브라질 유술 10단 빨간띠 유도 6단 검은띠 |
업적 | 브라질 무규칙 격투 발리투도(NHB) 랭크 1위(그의 대부분의 업적은 해당 경기에서 있었다.) |
계열 | 미츠요 마에다(Mitsuyo Maeda) > 카를로스 그레이시(Carlos Gracie) > 엘리우 그레이시(Helio Gracie) |
엘리오 그레이시의 생애
엘리오 그레이시는 1913년 10월 1일에 가스타오 그레이시의 3세대 스코틀랜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9명의 형제/자매가 있었고 엘리오는 작고 다부진 다른 형제들과 달리 키가 크고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때문에 두드러져 보였다.
엘리오 그레이시의 어린시절에 한 사건이 있었다. 1921년 그가 어릴 때 그의 가족이 파산을 하였고 그들은 고향인 벨렘 두 파라(Belem do Para)에서 큰 도시인 리오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그의 어린 시절 평안히 지나가지 않았고 이러한 사건들로 인한 대부분의 심리적 불안감은 그에게 큰 질병인 만성 현기증과 함께 건강이 불안정해졌다.
그레이시 패밀리는 벨렘 두 파라에서 보내는 마지막 해에 엘로 그레이시의 큰형인 카를로스 그레이시가 미츠요 마에다(별칭 : 콘데코마)를 만났다. 일본 강도관의 주짓수와 유도 선수인 마에다는 일본 무술을 알리고자 브라질에 당도하였다. 카를로스 그레이시는 마에다에게 정규적인 수련을 받았고 빠른 시일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카를로스 그레이시는 주짓수클래스에서 모든 것을 배운 후 형제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정규적으로 대련을 하였으나 엘리오 그레이시는 몸이 약하고 함께 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엘리오 그레이시는 한쪽에서 주짓수 게임을 연구하고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몇 해가 지난 1925년, 그레이시 패밀리는 리오 드 쟈네이로로 이동하였다. 가장 나이가 많은 맏형인 카를로스 그레이시는 그의 꿈인 첫번째 주짓수 아카데미를 만들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그는 동생들이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길 원했고 새로운 도전에 도움이 필요하여 그의 형제인 오스왈도, 가스타오, 엘리오, 조지 그레이시를 불렀다.
엘리오 그레이시는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카를로스 그레이시에게 사실을 숨긴 채 형제인 오스왈도, 가스타오, 조지 그레이시와 수련을 시작하였다. 카를로스 그레이시가 엘리오 그레이시의 수련을 목격 했을 때 벌써 그의 테크닉과 대련이 형제들에게 뒤지지 않았고 그리하여 카를로스 그레이시는 엘리오 그레이시가 계속 수련하는 것과 함께 수련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1928 – 변화가 시작된다
1928년 어느날 큰형인 카를로스가 수업 시간에 늦게되자 막내인 엘리오가 형을 대신하여 수업을 가르치게 되었다. 주짓수 기술은 직접 연마하지는 않았지만 수년간 큰형인 카를로스가 가르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아왔던 엘리오는 모든 기술들을 잘 알고 있었고 체격이 왜소했던 그로선 그런 기술로 덩치가 큰 상대들을 상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오는 포기하지 않고 힘과 스피드가 아닌 지렛대 효과와 적절한 순간 포착 등 자연스런 몸동작을 이용한 기술들을 개발해 낼 수 있었다.
1931 – The First Test
엘리오는 그 보다 덩치가 훨씬 큰 권투 선수인 Antonio Portugal을 제압 하였다.
이는 그가 개발한 기술들을 이용하면 체격이 왜소한 사람도 훨씬 덩치가 크고 운동 신경이 발달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엘리오는 권투 선수에게 기권을 받아냈다. 이에 고무된 엘리오는 일본식 주짓수 기술들을 약간 변형 시켜 덩치가 큰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들을 계속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엘리오 그레이시는 이후 6년간 형제들과 함께 그레이시 아카데미를 열기위해 많은 노력을하였다. 그 중 한가지 사건이 생겼는데 헤일라 그레이시가 남긴 책에 따르면 조지 그레이시가 엘리오 그레이시와의 결투를 통해 자신이 리오 데 자네이루에서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자 카를로스 그레이시는 이를 반대하여 조지 그레이시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기록되었다.
1938 – Helio Gracie vs. Landufo Caribe
엘리오 그레이시는 개인적인 이유로 다른 도시로 옮겨아야했다. 그로인해 링과 매트위에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12년 후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의 나이는 38세였지만 자신의 새로운 도전을 하였다. 바히아 주짓수 챔피언이자 그레이시와는 다른 계열이였던 Landufo Caribe와 결투를 하여 순식간에 승리를 거두었다.
1947 – Helio Gracie vs. Joe Louis
1947년 6월 6일 엘리오는 주짓수 보다는 권투가 더 우수하다는 Reader’s Digest의 기사를 반증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헤비금 복싱 세계 챔피언인 Joe Louis에게 끝장 매치를 하자고 도전을 하였다. Joe Louis의 매니저는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아 시합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엘리오가 그가 개발한 기술의 효율성을 증명하기 위해선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라도 시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어느날 엘리오 그레이시는 카를로스 그레이시를 도와 첫 리오 데 자네이루 주짓수 챔피언쉽을 주최하였다. 이 시합을 통해 리오 최고의 아카데미를 증명하게 되었다. 그들이 주최한 시합은 몇몇 팀에게는 거절을 당했지만 아직까지도 이름있는 선수들인 Pedro Hemetério, Oswaldo Fadda and Carlson Gracie 참가하여 승리한 시합이였다.
1951 – 마사히코 기무라와 대결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미국에서 일본이 점령한 나라를 복구하기 위해 지휘를 하였다. 이런 상황은 널리 퍼져 있는 군부,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법제화 하였고 이러한 개혁들 중 하나는 일본 학교 시스템에서 유도를 배우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많은 유도 선수들과 무술로 생계를 꾸려 나간 무도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17년 9월에 태어난 기무라 마사히코는 당대 최고의 유술가였지만 고향에서 더이상 유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시범 경기에서 유도 선수들을 소개하고 세계를 여행하는 국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카라시코라는 프로레슬링선수가 이끌어 마침내 기무라는 브라질에 입성하게 되었고 각지를 돌며 여러 무대에서 자신을 증명하였다.
카를로스와 엘리오 그레이시가 기무라를 알았을 때 그들은 곧바로 이 뛰어난 일본인 유술가에게 도전을 하였지만 기무라는 그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아 도전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레이시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한 테스트로서 기무라의 프로모터는 조직에 속해 함께 투어를 하고있는 엘리오 그레이시와 체중(70kg)이 비슷한 22세의 수퍼파이터 가토 유키오와의 시합을 주최한다.
엘리오 그레이시와 가토는 2번의 승부를 펼쳤고 첫번째 경기는 무승부, 두번째 경기는 엘리오 그레이스가 크로스 초크로 승리하였다. 이 승리는 기무라가 도전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그들은 1951년 10월 23일 10분씩 3라운드로 리오 데 자네이루에서 시합이 정해졌다.
1951년 10월 23일 엘리오는 당시 일본식 주짓수 최고 선수였던 마사히코 기무라와 시합을 하게 되었다. 엘리오는 그가 20년 넘게 개발하고 변형시킨 기술들이 엘리오보다 몸무게가 36kg이나 더 나가고 만약 자기를 상대로 3분 이상 버틸 수 있으면 이긴 것으로 간주해 주겠다면서 자신의 승리를 호언장담하던 일본식 주짓수 세계챔피언을 상대로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하던 차였다. 그러나 엘리오는 큰형인 카를로스가 후일 기무라라는 기술로 명명되어진 ’Shoulder Lock’이라는 기술에 걸린 동생의 부상을 염려하여 시합을 중단시키기 전까지 약 13분 동안이나 기무라를 당황 시켰다. 비록 시합에서는 졌지만 기무라는 엘리오가 개발한 기술에 감명 받아 일본에 있는 동료들에게 소개를 할 정도로 엘리오는 이 경기를 통해서 얻은 것이 훨씬 더 많았다고 여겨진다.
기무라와 엘리오 그레이시의 경기를 둘러싼 여러 신화가 전해졌고 그들의 경기 스타일은 그레이시를 알리기 위한 선전으로서 널리 퍼졌다.
- 첫번째 신화는 기무라가 경기에서 “내가 만약 엘리오를 3분안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진거라고 생각한다.” 라고 언급 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어느매체)는 어디에서도 그가 언급한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미디어와 사실상의 언론 매체에 따르면 그는 처음 10분 동안 엘리오의 기술을 시험해 보았고 2라운드 초반에 결승전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끝냈다.(현재도 불리우는 기무라 락은 이때 최고의 일본인 선수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 또 다른 신화는 두 선수 사이에 36kg의 체중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합은 체중 제한이 없었고 어느 누구도 체중을 재지 못 했다. 기무라가 분명 둘 중 더 무거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우리가 추측하기로는 체중 차이는 전에 비해 몸무게 차이가 10kg 더 나가는 것을 감안하면 체중 차이는 36kg이 나지 않을 것이다.
1955 – The Longest Fight
카를로스 그레이시는 리오 데 자네이루를 떠나 사업체를 돌보기 위해 포르탈레자로 옮겨 갔다. 그는 칼슨, 홀스, 카를로스 주니어 그레이시를 엘리오 그레이시에게 맡기고 떠났다. 5년 후 또 다른 도전을 받고 매트위에 올랐다.
당시 43세였던 엘리오가 1955년 5월 24일 Waldermar Santana와의 쉬는 시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끝장 시합을 치루었다. 비록 시합에서는 은퇴를 하였지만 그 보다 20살이나 젊고 체중이 20kg이나 더 나가는 그레이시 주짓수 아카데미의 제자인 Santana의 도전을 받아 들었다. 역시 정신이 약한 혼미해진 그의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카를로스가 시합을 중단시키기 전까지 시합은 쉬는 시간 없이 3시간 40분이나 계속 진행 되었다. 비록 Santana가 승리를 하였지만 젊고 운동신경이 우수하고 고도의 기술을 겸비한 격투기 선수의 공격을 거의 4시간 동안이나 받아 넘기는 엘리오의 능력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고 오래도록 기억되거 있다. 이러한 시합은 엘리오가 개발한 기술의 효율성을 알리는 좋은 기회였고 이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이것을 배우기 위하여 그레이시 주짓수 아카데미로 몰려들게 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게 되었다.
산타나와의 경기이후 그의 아들들과 형인 카를로스 그레이시의 아들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하였다. 그들은 현재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전설이라 불리우는 힉슨, 호이스, 칼슨, 홀스, 카를로스 주니어, 헬슨, 호리온 외 많은 이들이 있다.
그의 헌신으로 인해 주짓수는 그레이시 가문의 큰 상징이 되었다.
몇해 동안 그는 주짓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콧대를 꺾었고 그들 중 몇몇은 칼슨 그레이시와 같이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이런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를 배제하고는 틀림없이 주짓수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주짓수 10단이자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수련하고 사랑하는 최고의 무술을 창시한 엘리오 그레이시는 평생토록 그랜드마스터 엘리오 그레이시라고 우리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 엘리오 그레이시. 2009년 1월 29일 그의 나이 95세에 죽음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