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슨 그레이시는 주짓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칼슨 그레이시 아카데이의 최고의 대표 인물이자 지도자이다. 세계의 많은 그래플링 팀들은 칼슨 그레이시 계열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이는 칼슨 그레이시의 유산과도 같다. 관련이 있는 팀들로는 팀 노바 유니아오(Nova Uniao), 아메리칸 탑팀(American Top team – ATT), 브라질리언 탑팀(Brazilian Top Team – BTT) 외 많은 팀들이 있다.
칼슨 그레이시가 리오에 있는 그레이시 아카데미를 떠나고 일반인들에게 주짓수를 가르치기를 결정했을때 그의 삼촌 엘리우 그레이시와의 경쟁은 시작되었다. 엘리우는 칼슨이 일반인들을 가르치기로 한 결정에 대항했다.
엘리우는 오직 비싼 개인레슨으로 주짓수를 가르쳤지만 칼슨은 저렴한 가격으로 일반인 그룹클래스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칼슨은 또한 돈을받지 않고 가난한 제자를 받아드리기도 했다. 그는 자비와 친절하기로 유명했다.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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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브라질 |
이름 | 칼슨 그레이시Carlson Gracie) / 본 에듀아르도 그레이시(Born Eduardo Gracie) 그가 태어난 후 칼슨 그레이시로 이름을 바꿨다. 이유는 그의 아버지 카를로스 그레이시(Carlos Gracie)는 ‘C’와 ‘R’ 스펠링이 강함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칼슨 그레이시가 태어난 후 이름을 바꾸었다. |
닉네임 | 칼스오(Carlsão) |
체급 | 67kg – 72kg |
경기기록 | 18번 경기 중 1번 패배(판정패) |
계열 | 미츠요 마에다(Mitsuyo Maeda) > 카를로스 그레이시(Carlos Gracie)> 칼슨 그레이시(Carlson Gracie) |
칼슨 그레이시는 1932년 8월 13일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레이시 주짓수 설립자인 카를로스 그레이시의 아들이며 1950~1960년대 노홀즈배어드/베일유도 경기(No Holds Barred/Vale Tudo) 최고의 주짓수 선수였다. 칼슨 그레이시는 경찰들의 주짓수 코치도 겸임하였고 주짓수 세계의 역사를 만든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최고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짓수 트레이너로서의 삶은 가족들과 그가 가르치는 제자들간의 불화와 실랑이가 있었다.
칼슨 그레이시의 첫 시합은 어린나이인 5살 때 오픈 토너먼트 주짓수와 서브미션 레슬링으로 시작하였다. 17살 때에는 자신의 고향 리우데나제이루의 처음 열린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유명한 그레이시 가문은 심지어 오랜기간 대부분의 그의 아카데미의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막은적이 없었고 그와 그의 삼촌들은 다른 나라에 가문의 유산인 주짓수를 알리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그의 나이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온전히 그들만의 파이트에 헌신을 다했다.
18세 칼슨 그레이시의 첫 프로 무대는 자신체중보다 25kg이나 차이가나는 92kg의 유도 귀재인 사카이(Sakai)와의 대결이였다. 타격이 없는 그래플링 룰만을 적용하였고 무승부일 경우 두명의 심판의 판정하에 결정이 나는 방식이였다. 이 경기 이후 칼슨 그레이시는 도전을 받아 들인다는 것을 언론에 이야기한다. 이 경기의 수익금은 북서지방의 가품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사람들에게 자선 기금으로 보내며 강한 유대관계를 가졌다. 100kg의 카포에라 파이터인 Cirandinha가 도전을 하였고 칼슨 그레이시는 마운트에서 타격으로 탭을 치며 패배를 맞았다.
칼슨 그레이시는 계속된 시합을 위해 스킬을 갈고 닦았다. 그는 23살에 브라질의 유명한 파이터인 Waldemar Santana를 만났다. 그는 칼슨 그레이시의 멘토이자 삼촌인 엘리우 그레이시는 넉아웃 시킨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칼슨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그레이시는 그때의 상태를 기록하고 30만 레알을 주었다.(이것은 그들에게 큰 행운이였다.) 반면에 Waldemar는 살아남기위해 그의 아들의 우수한 테크닉을 관리하였다.
불행히도 카를로스에게 Waldemar(기록에 따르면) 는 칼슨 그레이시의 공격을 방어적인 경기로 풀어가며 유지하였다. 그 경기는 무승부가 되었고 파이트 머니는 행복한 산타나에게 주어졌다. 다음 경기는 금방 정해졌고 이번에는 칼슨 그레이시가 가족의 영예를 지키기 위해 근심을 하며 승리를 위해 세심히 관리를 하였다. 이번 경기는 Rio de janeiro의 Maracanazinho라는 경기 장소에 4만개의 좌석이 모두 판매되었다. 이번 경기에서는 칼슨 그레이시는 산타나를 마운트에서 타격으로 승기를 거머쥐었다. 두명의 선수는 2년 후에 다시 만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와 처음 두번의 경기들은 없어졌고 세번째 경기는 희미하게 다시 한번 무승부가 났다.
칼슨 그레이시는 항상 새로운 선수와 스승을 키워냈고 그는 사람들에게 결투 신청을 위해 Rio의 해변가를 갔다. 도전자들은 싸우기 위한 어떤 방법(펀치, 킥, 박치기 등등)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반면 칼슨은 서브미션 없이 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그래플링만을 사용했다. 칼슨은 그들이 항복을 하기 전까지 그들을 덮고 있었다.
칼슨 그레이시는 그의 삼촌인 엘리우와 함께 거의 30세가 되는 동안 그레이시 아카데미와 작은 경쟁들에서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엘리우의 교육방법을 무시하였다. 칼슨 그레이시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의 지식을 펼치기 위해서 자신만의 아카데미가 필요했다. 그는 유명한 칼슨 그레이시 아카데미를 첫번째 주짓수 그룹 클래스로 열었고 또한 아래 레벨의 클래스를 열며 무료로 수련하는 학생들을 승인하였다. 모든 헌신을 되돌렸고 시합에 나갔다. 칼슨의 교육 방침아래 모인 학생들은 하나의 가장 큰 팀으로 완성되었다. 칼슨과 함께한 수련생으로는 Nova Uniao Academy의 잘 알려진 선수 Ricarido Liborio, Andre Pederneiras와 월드 챔피언이고 UFC 미들급 챔피언인 BTT(Brazilian Top Team) Murilo Bustamante, URF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Vitor Belfort “The Phenom”, Walid Ismail (또다른 주짓수 레전드) 이외에 많은 선수들이 있다. 2000년대 초반 칼슨 그레이시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팀은 Rio de Janeiro에서 격하되며 팀은 해산되었다. 브라질의 수련생 대부분은 그들의 마스터에 대한 충직을 간직한채 자신들의 아카데미를 열었다.
항상 독선적이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2006년 2월 1일 시카고에서 그의 죽음은 주짓수계에 큰 충격을 가져왔고 그의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